FIRE를 준비할 때 우리는 보통 "연 평균 몇 %"라는 한 숫자에 기댑니다. 그런데 은퇴 후 자산이 버티느냐는 평균 수익률만이 아니라 그 수익이 들어오는 '순서'에도 크게 좌우됩니다. 이것이 수익률 순서 위험(sequence of returns risk)입니다.
돈을 모으는 적립기에는 수익 순서가 바뀌어도 최종 금액이 거의 같습니다. 매년 같은 금액을 더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. 하지만 은퇴 후 매달 생활비를 빼 쓰는 인출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. 초반에 시장이 -30% 빠지면, 이미 줄어든 자산에서 또 생활비를 인출하게 됩니다. 같은 금액을 빼더라도 자산이 작아진 상태에서 빠지면 비중이 커지고, 이후 시장이 반등해도 '회복시킬 원금'이 그만큼 줄어 있어 자산 수명이 크게 단축됩니다.
가상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. 두 사람이 똑같은 자산으로 은퇴해 매년 같은 생활비를 인출하고, 30년간의 연도별 수익률 집합도 완전히 동일하다고 합시다. 차이는 단 하나, 순서입니다. 한 사람은 좋은 해가 앞에, 다른 사람은 나쁜 해가 앞에 옵니다. 평균 수익률은 정확히 같지만, 나쁜 해가 앞쪽에 몰린 사람은 자산이 수년 더 일찍 바닥날 수 있습니다. 핵심은 "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은퇴 첫 5~10년의 장세가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"는 점입니다.
한국에서 일찍 은퇴하면 국민연금 개시(보통 60대)까지 오롯이 자산만으로 버티는 공백기(소득 크레바스)가 깁니다. 이 시기에 큰 하락장이 겹치면 순서 위험이 그대로 노출됩니다. 게다가 인출액에는 해외주식 양도세·배당 종합과세·지역가입 건강보험료가 더해져 실제로 빼 써야 하는 금액(세전 기준)이 생활비보다 커지는 경우가 많아, 같은 하락에도 자산이 더 빨리 깎입니다.
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합니다. 다만 순서 위험은 '평균만 보면 안 보이는 위험'이라는 점을 알고 버퍼와 유연성을 미리 설계해 두는 것만으로도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당히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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